단양군 적성면에 위치한 만천하 스카이워크 맞은편 능선 하단부에 위치한다. 우측으로는 단양강잔도가 조성되었다. 지광진 묘소는 봉분 앞으로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양 옆으로 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봉분 우측에는 새롭게 세운 지광진 묘비가 있다. 이 묘비 전면에는 ‘통덕랑충주지공광진지묘(通德郞忠州池公光晉之墓)공인영해박씨부좌(恭人寧海朴氏祔左)’라고 적혀 있고, 후면에 세부내용, 우측면에 건립연대를 기록하였다. 한편 본래 있었던 묘비는 묘소의 하단 경사면에 따로 세워두었다. 현재 비신만 노출되어 있는데, 윗면은 호형(弧形)으로 다듬은 형태이다. 비신의 측면과 후면에는 이끼와 지의류에 의한 피해가 확인된다. 비면은 전면과 후면, 우측면에 새겼는데 약간 마모되었으나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다. 한편 이전의 비문과 새로 세운 비문을 비교한 결과 전면과 우측면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후면의 내용은 동일하다.
통덕랑 충주 지광진의 묘 부군의 휘는 광진이며 자는 명수이다. 통덕랑을 지냈으며 호는 청구자이다. 고려조 태학사를 지낸 휘 용하는 공의 11대조이다. 행 부사직 증 사복시정 휘 경호가 공의 부친이다. 대대로 학문이 이어져 내려왔다. 공은 어려서부터 덕행과 기량이 뛰어나고 총명함이 깊고 넓었다. 8세에 스스로 청연자라 하며 해석하기를, ‘청(淸)’에서는 그 깨끗함을 취하고 ‘연(淵)’에서는 그 깊음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15세에 자경잠을 지어 안씨가 스스로 기약한 것으로써 학문을 하고, 신령스러움을 지키고 뜻을 정하는 것으로써 널리 많은 책을 보았다. 특히『주역』, 천관, 직방, 율려, 구고의 학설에 조예가 깊었다. 유추하고 두루 통달하여 홀로 그 묘한 경지에 이르니, 밀암 김지행 공은 도와 의가 있다고 일컬었다. 공은 천인에 대해 궁구하였으며, 넓은 도량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상사 신택빈은 ‘해지고 남루한 옷을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품은 생각이 활달하다. 삼공이 앞에 있어도 본 바가 없으며, 많은 녹봉이 뒤따른 데도 돌아보지 않았다.’라고 하며 두 공의 추천이 있었다. 참언근언, 역난의의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참판 김매순 공이 서문을 짓고 도사 이정관 공이 행장을 찬하였다. 경종 계묘년(1723) 1월 10일에 태어나 영조 병신년(1776) 4월 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4세였다. 첫째 부인 해주 이씨, 둘째 부인 전주 이씨는 모두 자식이 없었다. 셋째 부인 영해 박씨는 맑고 아름다운 덕행으로 칭송되었다. 아들 세겸과 세함을 숙부에게 출계하였다. 증 이조참의 휘 광석은 운회로써 아들이 귀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손자 운협, 운제, 진사 운철 등 증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