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동량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마을에 세운 효자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단청이 잘 되었다. 편액은 "효자 증통훈대부리조좌낭민동양지문 상지륙년 병인사월 일명정(孝子 贈通訓大夫吏曹佐郎閔東亮之門 上之六年 丙寅四月 日命旌)"이라 되어 있다. 민동량은 본관이 여흥, 자는 군삼, 호는 송암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읽고 해독하니 신동이라 했다. 이미 칠팔세 때에도 부모가 병이 나면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부모님의 병을 간호했다. 부모병을 치료하고자 왼손 네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렸으며, 좋은 약이라면 가재를 돌보지 않고 구하여 썼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순조 6년(1806)에 효자의 정려와 복호의 은전이 내렸으며 통훈대부 이조좌랑에 증직되었다.